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재해석 가족 에세이

카키브라운

by eye-bird 2024. 6. 13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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찰랑찰랑



글짓기 동아리 모임에 갔다.
“머리 염색해야겠네.” 라는 지인의 말을 들었다.
나는 얼굴보다 머리카락으로 신선이 쏠릴 만큼 희끗해진 나이를 스스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. 머리를 질끈 묶고 젤만 바르고 다니길 몇 년, 아이 셋 키우는데 머리에 무슨 신경을 쓰나 싶고 커트 하는데도 아이들에게 ‘척’ 주던 돈을 나에게 쓰기는 아까웠다.
6개월 전 유방조직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초초한지.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 온통 신경이 쓰였던 때가 떠올랐다.
내 앞에 두 명의 여성이 검사 결과를 듣고 돌아갔다.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삼십 분이 몇 달을 기다리는 시간 같았다. 입 안이 바짝 말랐다. 기다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. 오만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.
“양성입니다. 크기도 크지 않아서 6개월 후 초음파검사 하러 오세요.”
마음속으로 ‘감사합니다. 감사합니다.’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.
병원을 돌아서서 제일 먼저 간 곳은 미용실이었다. 혹시라도 결과가 안 좋으면 방사선치료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3주를 기다리는데, 떨쳐야 하는 마음을 자를 머리카락처럼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. 그 마음에 해방되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에 들른 거다.
 
“파마해주세요!”
머리에 뽀글뽀글 힘을 주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.
그 후로 5개월이 지난 어느 날, 지인이 염색해야겠다고 한 말이 다시 나를 깨웠다. 세수하면서 거울을 쳐다봤다. 옆머리를 들추면 감당하기 어려운 흰 머리카락들이 요동쳤다. 검은 머리 반, 흰 머리 반. 온통 흰 머리가 나를 뒤덮을 것만 같았다.
사십대 중반부터 흰머리가 하나 둘 보이더니 후반이 되니까 어느새 머리에 삼분의 일을 점령한 것 같다. 흰 머리가 내 마음의 삼분의 일도 시나브로 점령했다는 생각이 든다.
하기야 아이들 먹는 것, 입는 것, 쓰는 것에 더 신경 쓰는 나를 발견하는 게 요즘은 아무렇지 않다. 나를 위해 쓰고 싶다는 욕심이 줄어들게 흰 머리카락이 마음에 흰 이불을 자연스레 덮어주었던 것이다. 속상하지 않게 매일 차곡차곡 가슴에 들어와서, 내려놓고 사는 삶의 美를 알려주는 게 아닌가.
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갈까 고민하다가 인터넷사이트에 만원하는 염색약을 골라 주문했다.
‘카키브라운’
 
긴 웨이브머리에 카키브라운 머리카락을 가진 연예인의 아름다운 머릿결에 순간 홀릭됐다.
나는 염색약으로 열심히 빨래하듯 치대서 비닐모자에 머리카락을 맡기고 30분을 참았다.
머리에 린스도 꼼꼼히 발라서 헹궈 드라이를 하고 거울을 봤다. 그 연예인의 머리카락은 어디로 간 걸까? 내 모습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.
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염색이 잘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순전한 착각이었다.
흰 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염색이 안 된 것이다.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할 걸…….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곧 이런 내 모습을 인정하게 됐다.
 
“흰 머리에 더 익숙할 나이가 됐구나!”
한편으론 “흰 머리카락이 더 자신을 드러내고 뽐낼 나이가 됐구나!” 라고 느꼈다.
숨기려하지 말고 이 나이, 이 머리카락을 즐기고 감사해야할 나이 말이다. 카키브라운 머릿결에 희끗한 머리카락의 섞임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, 또 새로운 행복감이 봄바람처럼 밀려왔다.
“엄마 머리 봐, 어때?”
“흰 머리는 그대론데, 염색한 것 맞아!” 라고 막내딸은 말했지만,
“아니야, ‘카키브라운’ 이라고.”
머리카락은 염색을 하나 마나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내 마음은 카키브라운 머릿결로 온통 찰랑이고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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